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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maition review

이 세상의 한구석에 :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들어가며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한국 개봉 전에는 평가가 매우 높았다. 부천에서 했던 BIAF에서도 상영했을 시에 관객 평가가 상당할 정도로 평이 좋았지만 소재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특전 선착순 '1만명'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상영이 마감되었다. 다행히도 용산 CGV에서 상영 기간 중에 봐서  다행이었다. 

소재가 전쟁과 민간인피해자라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배 및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라는 역사를 겪은 한국에서는 '일본의 전쟁피해자 주제의식'에 대해서 공감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리뷰나 평점들이 일본에 대한 역사의식으로 인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왜곡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일본과의 역사 관계에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방향으로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제의식과 소재로 이야기를 하는 이 애니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부정적인 평가를 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잘 만들었고 실제 원작도 그렇고 애니메이션 자체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책임은 해당 국가 수뇌부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이 애니메이션이 잘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그러한 주제의식은 '당연함'으로 표현이 된다. 2차대전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온 것이 많았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하는 커피나 빵도 당연한 식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안을 파고 들면 파리바게트 제빵사 고용문제 혹은 매번 나오는 공정커피무역 등등 수 많은 이해관계가 섞여 있고 그로인해 피해를 받는 집단과 사람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당연한 소비 당연한 구매 등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산다. 이런 것이 잘 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나라가 하나의 개인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을 어떻게 개인의 탓을 돌릴 수 있을까?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이런 의식을 가지고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일본의 전쟁 당시 민간인들 또한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문제이상으로 자유롭지 않다는 자각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애니메이션을 그것을 정말 잘 표현하고 와닿게 해주었다. 이제부터는 어떤 것이 어떻게 표현이 되었는지 알아보려 한다.



당연함과 분노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처음부터 평범한 주인공의 평범한 삶을 보여준다. 어렸을 때 어린 아이 다운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학교를 다니고 집안일을 도와주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첫사랑도  경험하고 주변 마을 사람 더 나아가 히로시마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생활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당연하다고 여긴다.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 역시 이러한 당연한 삶을 우선시 하기 때문에 그저 몰래하거나 소소하게 한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닳고 닳은 연필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 그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수긍하는 모습 그리고 친구의 캔버스에 대신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당연한 삶에 적응해 나가는 주인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당연한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스즈는 나이가 어느정도 되자 구레로 시집을 가게 된다. 그 곳에서는 히로시마와 또 다른 '당연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의 사진은 현재 구레 항의 모습이다. 구레 항은 2차대전중 일본해군 군항으로 메이지 시대부터 자리잡은 해군 조병창이 있는 지역이다. 즉, 이곳은 일본의 전쟁에서 뗄레야 뗄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스즈는 이곳으로 시집왔고, 남편은 해군 법무관 서기이며 아버지는 항공기(함재기)에 들어갈 엔진을 연구하는 엔지니어였다.  

 

스즈는 히로시마의 당연함과 다른 또 다른 당연함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곳에 적응해 나갔다. 물론 히로시마에서의 당연함과 같은 맥락에 있지만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현실이 보이는 곳에서도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갔다. 아니 순응했다고 하는 표현이 맞다. 공습대비교육에서는 백린탄 지연신관 등의 탄종공부 및 공습 대처 방법 등등의 각종 군사 지식을 배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실제 구레 군항 공습이 실시되며 전쟁의 상황은 악화되고 배급이 줄어든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따로 살던 남편 슈사쿠의 누나인 케이코까지 구레로 돌아오면서 더더욱 전쟁상황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공습으로 인해 피해가 누적되고 전쟁의 현실이 다가왔어도 스즈는 믿고 있는 아니 내재화되어 깨닫지도 못하는 '당연함'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러나 공습의 낙하된 폭탄의 지연신관으로 인해 같이 피난하던 케이코의 딸 하루미는 스즈의 옆에서 사망하게 되고 스즈는 오른손을 잃게 된다.  그리고 나서 천황옥음 방송을 듣고 나서 항복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를 한다. 


이 분노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 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여기서 곡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즈가 항복선언을 듣고 왜 항복했냐하면서 온갖 화를 낸다. 과연 땅바닥을 치면서 화내는 것은 정말 패배에 대해서 화내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전쟁 패배 그 자체에 대한 분노라기보다 전쟁으로 발생한 '당연함'에 대한 분노이다. 자신은 국가에서 하라는 대로 아니 사회에서 원하는대로 가정에서 원하는대로 하라는 대로 그저 해왔을 뿐이다. 그저 묵묵하게 배급도 받고 전쟁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죽어도 혹은 다쳐도 말 그대로 나라가 하자는 것에 사회가 하자는 것에 대한 당연함.. 스즈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반감을 가지지 않았고 묵묵하게 살아왔다. 케이코의 딸이 죽어도 자신을 탓하고 자신이 무력해져도 줄곧 당연함으로 인해 자신만 탓한다. 그러나 전쟁에 항복한 것을 알게되자 분노를 한다. 


그렇다면 왜 전쟁을 한 것인가? 왜? '당연하다'라다는 것은 사회 전반에 흘러는 고통을 감내하고 견디고 희생하는 그러한 분위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스즈도 그 당연함 속에서 인내하며 버텼다. 자신의 가족들이 다치거나 죽어도 심지어는 본인의 팔이 없어져도 그 당연함 하나로 버텨왔다. 그러나 그런 당연함이 전쟁패배선언으로 없어졌다. 그러자 스즈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버텨왔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강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리고 이 애니메이션의 가장 클라이막스인 태극기 장면이 나타나게 된다. 





주인공은 태극기를 본 이후 바다 건너온 쌀과 콩으로 자신이 연명하고 다른 나라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걸 갈취해서 버텨온 자신에 비참함을 느낀다.

여기서가 바로 이 애니메이션 주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위해 희생하고 버텨왔지만 그러한 행위 자체가 자신도 다른 국가에 대한 폭력행사자이며 그것을 소비함으로써 자신도 그러한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다. 특히, 태극기가 나온 것은 대단히 중요한데 바로 주인공의 당연함을 부정하는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이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일본도 원폭으로 인해 공습으로 인해 피해자의 성격을 지닌 전범국이라는 이중적인 위치를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 일제강점기 시절의 역사적 경험이 아직까지 이어지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드리기 쉽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면에서 이 주인공은 작품 내에서 실제 역사적 지식이나 넓은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할까? 바로 이 대사와 행동 자체가 주제이기 때문이다. 


원작을 살펴보면 이러한 이유를 더 쉽게 알 수 있다.







- 이 나라에서 정의가 떠나간다 - 

스즈 : (태극기 컷)...아아. 폭력으로  복종시켰다는 것이구나.

그러니 폭력에 굴할 수 밖에 없는것인가. 이게 이 나라의 정체인가. 내도 모른 채로 죽고 싶었어.[각주:1]



원작에서는 좀 더 직접적인 대사로 주제의식을 나타냈다.  일본에 존재했던 당연함이라는 것의 정체 그리고 그 당연함에 순응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를 보여준다. 당연함의 정체는 폭력으로 유지되었던 일본 제국 그 자체를 뜻 한다. 이를 통해서 전쟁의 책임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연함에서 벗어나서 그걸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매우 힘들다. 실제로 전쟁에서 피해를 입어도 온갖 고생을 해도 쉽게 깨지기 힘들다. 직접적인 제스처가 있어야 그제서야 받아들이고 후회를 한다. 하지만 그러한 후회는 이미 이 세상에 많은 피해를 주고나서이다. 그 책임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 말해주고 있다. 애니메이션이든 원작 만화든 말이다.


그렇다. 이 애니메이션은 결국 2차대전 당시의 일본의 '당연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구레군항 공습과 원폭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전쟁의 피해자는 전쟁을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그 피해자임을 인식시킨과 동시에 위와 같은 메세지를 전달하여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식 

그리고 전쟁에서 일어난 온갖 침략성에 대해서 그 민간인들조차 자유롭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즉, 전범국의 민간인은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라는 것을 닫게된다. 




마치며




왜 이 작품을 영화관에서 봐야하는지 말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무리하려한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와 구레군항공습이라는 두 소재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앞서 열심히 말한 메세지 전달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현장감을 느껴야한다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즉 우리가 이 작품을 볼 때 구레군항에 있다는 현장감을 느끼고 작품의 서사에 몰입 해야한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우리가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던지 이야기가 강한 흡입력을 존재하던지 여러가지 이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이야기의 힘이나 주인공의 개성에서 그러한 몰입요소를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선택한 것은 구레 군항이라는 지역적 특색이다. 구레 군항 공습을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면서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소리'이다. 


공습은 시각적인 폭발뿐만 아니라 폭격기의 엔진소리, 방공포의 포격소리, 폭탄 낙하하는 소리, 폭탄 폭발음 등 당연한 사운드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그림에서 폭격기의 움직임과 대공포를 시각적으로 알아채기 힘들다. 그러나 소리로 그것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 그것은 집에서 느끼는 것보다 영화관에서 느끼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영화관에서만 즐길 수 밖에 없는 음향시설은 이 작품의 매력을 한 껏 올려준다. 짧은 상영기간 내에 이것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 이 작품은 전범국에서 전쟁의 피해자와 관련된 소재를 통해서 이야기를 펼쳤고 메세지를 전달했다. 그것은 사운드를 통해서 몰입감을 극대화해서 우리에게 전쟁에 대해서 한층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면 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우리는 식민지 국가였으며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수많은 피해를 받아왔다. 


그래서 이 작품이 불편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공감이되며 이해할 수 있다. 


한발짝만 물러서 이 작품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인 전쟁의 피해와 책임에도 공감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관에서 이제는 못 보지만 만일 볼 기회가 생긴다면 불편한 감정은 살짝 억누르고 작품의 이야기를 들어봐주었으면 한다. 


이렇게 2차대전의 일본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은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전이 아닌 책임이라는 메세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온 일본의 행보와 다르기 때문이다. 


소재를 보고 걸렀던 사람이 만일 이 부족한 글을 본다면 다시 보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좋겠다.


 



  1. http://bbs.ruliweb.com/news/board/1002/read/2118826 베스트 댓글 참고 [본문으로]